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즈키 시게루 (문단 편집) === 장르와 화풍 === >'''또한 디즈니와는 달리, 미즈키는 가족 이야기에만 국한하는 것에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전원 옥쇄하라!]], 8권으로 된 "쇼와: 일본의 역사(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만화를 포함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그의 시대와 일본의 행동에 대한 처참하게 직설적인 일련의 묘사들을 썼다. 자서전적이고, 연구되고, 픽션화된 그 작품들은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와 [[조 사코]]의 만화 [[저널리즘]] 작품과 같은 각색들의 혼합물처럼 읽힌다.''' >---- >— [[더 뉴요커]][[https://www.newyorker.com/culture/culture-desk/shigeru-mizukis-war-haunted-creatures|#]] 한쪽 팔이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꼬박 하룻밤을 자고 싶은 마음에도 불구하고, 미즈키는 긴 경력동안 놀라운 수의 만화들을 만들어냈다. 한 팬 사이트는 아직 미완성이라고 선언하면서도 그가 만든 작품이 약 760개 이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독보적인 만화는 일본 요괴 만화를 대표하는 "[[게게게의 키타로]]"였다. 이 만화는 초자연적인 고통 속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요괴 친구들로 이루어진 팀을 이끌고 있는 외눈박이 요괴 아이 [[키타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미즈키는 어린시절 연로한 이웃인 농농할멈[* 본명 카케야마 후사(景山ふさ). 미즈키 가족의 집안 일을 도왔다고 한다. 농농할멈은 그녀가 기도사의 아내였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에게서 요괴나 도깨비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농농할멈의 이야기들은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줬으며, 미즈키 작품의 원점이 됐다. 농농할멈은 어린 시절 미즈키에게 요괴라는 또 다른 세계를 알려줬다고 한다. 미즈키 시게루는 농농할멈에 대해 "이 자그마한 할머니가 내 생애를 결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농농할멈에 대한 이야기는 미즈키 시게루의 자전적 만화이자 대표작 중 하나인 '농농할멈과 나'에 자세하게 그려졌다. '게게게의 키타로'의 성공으로 인해 재정적으로 여유가 생긴 미즈키는 전시 경험의 깊이를 좀 더 성숙한 독자들을 위한 만화를 그렸지만, 그의 전쟁 이야기들 중 어느 것도 거의 일본 내에서 국내적인 찬사를 얻지 못했고 오히려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만화 [[전원 옥쇄하라!]]와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는 서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만화상인 [[아이스너상]]과 [[앙굴렘 국제만화제]] 수상작이다.] 그가 전쟁 만화를 썼다는 사실이 잘 알려졌지만, 일본 팬들은 해외에서 미즈키가 요괴 만화가 아닌 전쟁 만화로 유명하다고 말하면 놀란다. 미즈키의 찌그러지고 양식화된 인간 캐릭터들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점묘법]]으로 정교하게 음영 처리된 매우 현실적인 배경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현실주의와 만화 사이의 이러한 분열은 그가 사회적 비판에 몰래 빠져들게 하면서 그의 이야기 줄거리의 부조리를 증폭시킨다. 미즈키는 일본의 만화가 중 마지막으로 전투의 공포를 직접 경험했고, 그들을 [[미화]]하려는 [[일본 극우사관|일본 극우]]들을 밀어내는데 그의 경력을 보냈다. 1991년 그는 [[일본군]]이 중국과 한국에서 난동을 부리는 동안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상세히 묘사해 책 전쟁과 일본(戦争と日本)이라는 짧은 작품을 출간했다. 이 작품은 일본의 [[극우]]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작품과 같은 [[수정주의]] 만화에 대한 강력한 대척점 역할을 하며, 나아가 미즈키가 일본의 모든 희생자들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길도 제공했다. 1988년부터 1989년까지 연재한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 시리즈'에서도 같은 접근 방식을 따르고 개인적인 일화들과 결합된 쇼와 역사를 묘사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age 즈키.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ain_14.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31382-346-724464-0.jpg|width=100%]]}}}|| 일본 만화계가 [[간토]]를 중심으로 한 [[만화]] 진영과 [[간사이]]를 중심으로 한 [[극화]] 진영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던 경향에서 자유로웠던 만화가였다. 귀향 이후 그림연극 일에 임했던 것과 더불어 전후 일본에 전파된 미국 코믹스에 영향을 많이 받아 초창기 그림체는 극화체에 가깝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극화에 '''가까운''' 그림체였을뿐, 그가 '극화공방'[* 1956년 오사카에서 설립된 1세대 극화 만화가 단체.]의 회원이나 기타 극화 단체에 참여한 경력이 없고, [[소년만화]] 잡지로 만화 연재를 옮긴 것은 시대적 흐름에 따라 결정한 판단이기 때문에 섣불리 한쪽 진영의 만화가로 단정지을 수 없다.[* 비슷하게 [[미국 만화]]에 영향을 받은 만화가론 [[테라사와 부이치]], [[몽키 펀치]] 등이 있다.] 고풍스러운 만화조와 아메코미와 서양동 판화에 영향을 받은 섬밀하고 농후한 배경을 합친 당대 일본에서 유일무이한 화풍이다. 잘나가는 사람이 되어 어시스턴트를 사용할 수 있게 되고 나서는 [[점묘법]]을 많이 사용하고, 초목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쓰여진 화면이 이야기의 분위기를 북돋았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독자 노선을 걸은 인물로 평가받으며 [[데즈카 오사무]]의 영향을 받지 않은 [[천재]] 만화가로 평가 받는다.[[https://www.youtube.com/watch?v=l7PKQLNSHYE|#]] 미즈키 시게루는 만화가는 화력도 중요하지만 [[스토리]]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데즈카 오사무]]의 지론과 동일하다. 그는 현대의 일본 만화를 보고 '요즘은 그림은 잘 그리는데 이야기가 재미없는 것들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중요한 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느냐로, 그건 아무리 그림 연습을 해도 안돼."라고 말했다. 실제로 미즈키 시게루는 '나는 만화가가 되지 않아도, 소설가가 되면 [[나오키상]]을 탈 수 있었다.'라고 말하고 있어 원래 소설가 지망생이기도 해서 스토리에는 상당히 자신이 있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만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스토리라는 뜻이다. 미즈키 시게루는 그림 실력도 출중해서 '''당대 최상급 화력(畵力)'''이었다. 미즈키의 그림이라고 하면 한눈에 '미즈키 시게루'라고 할 수 있는 독특한 스타일로 대부분의 일본의 만화팬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봐도 미즈키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만큼 오리지날리티가 뛰어나다. 호불호의 취향도 넘어서 그의 개성적인 터치는 너무 독특해서 당대의 만화가들은 아무도 흉내낼 수 없을 정도였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eDMO1EVwAETQtL.jpeg.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eDORJoVQAIEqN7.jpeg.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DeDOS-6U8AIuksU.jpeg.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7425844.jpg|width=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que-14190806409.jpeg.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61OL1Xwe3IL.jpg|width=100%]]}}}|| ||<-2> {{{#ffffff '''그의 디테일한 묘사'''}}} || 초기 대본 만화가 시절엔 주로 전기 장르[* 또한 대본 만화가 시절 한때 전기물을 모은 잡지를 주재했는데 열성적인 극소수의 구독자를 제외하면 매출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 무렵「오오조라의 사무라이」를 막 출판한 사카이 사부로에게 '전기물은 이긴 내용이 아니면 안 된다.'(승리하는 내용이어야 팔린다) 하는 어드바이스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개전 후 잠시 영전을 몰아 적 전투기를 격추시키는 승전을 계속해 과달카날섬전 첫날에 중상을 입어 실질 그곳에서 전장 생활이 끝나, 결과적으로 [[라바울]]에서의 지옥 시기를 경험하지는 않았던 사카이에 대해, 압도적인 무력의 연합군 앞에 패전의 지옥도가 된 전장 밑을 체험한 미즈키와는 실체험이 정반대였기 때문에, 미즈키에게는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도, 어드바이스에 따라, 대전 전기의 전과를 올린 전투에 취재한 만화도 그렸지만, 소재가 패색이 짙어지는 말기로 옮겨감에 따라, 아니나 다를까 매상은 떨어져 갔다. 머지않아 주재하던 잡지는 망했다.]와 개그 장르를 더불어 다양한 장르의 만화를 그렸다. 여러 필명들을 활용해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자기 만화들이 사람들에게 관심받지 못하면서 점차 [[그로테스크]]한 경향이 늘어나 출판사한테 외면당하는 등 점점 상황이 불우해져 갔고, 한땐 다른 필명을 사용한 작품들이 자기 의사에 상관없이 멋대로 필명이 바뀌기도 했다고 한다. 대본소 만화가 시절의 작품들[[http://koinu2005.seesaa.net/pages/conv_default/image/mizuki2.jpg|#]] 1966년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소년 선데이]] 연재의 '이상하고 이상하고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요괴 그림이나 관련된 전승들을 실은 요괴 도감 만화들을 연재했었다. 그림이 존재하지 않는 요괴는 직접 모습을 그리기도 했기 때문에, 일본인한테 그런 요괴들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1995년 세계 요괴 협회를 설립해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한 작품도 많이 연재했고, 또다른 대표작인 [[전원 옥쇄하라!]]는 내용의 90% 이상이 실제 자신의 경험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의 어시스턴트였던 [[이케가미 료이치]]는 인터뷰에서 "미즈키 선생님이 캐릭터나 스토리를 혼자서 만드셨나요?"라는 질문에 "그렇습니다. 대본 버전에서 이야기를 꺼낼 때는 좋지만, 새롭게 스토리를 만들 때는 굉장히 고심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주간지라 그림은 한 3일이면 주는데 3일째는 밤을 새거든요. 그러니까 총 4일 정도. 미즈키 선생님은 '네임'[* 일본 만화업계에서는 그림[[콘티]]를 네임이라고 부른다.]을 끝까지 짜고나서 작화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러프를 그리고는 어시스턴트에게 건네주어, 점점 진행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또 인터뷰어가 "미즈키 선생님은 만화가가 되고 싶었다기보다는 순수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는 인상도 받는데요."라고 질문. 이케가미는 "아니요. 그건 다르네요."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물론 그림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만, 미즈키 선생님의 작품의 [[근본]]은 대화의 재미입니다. 그것은 훌륭한 재능입니다. 미즈키 선생이 원래 가지고 있던 낙관적인 성격과 역시 전쟁에서 왼손 하나를 잃어버리고 그것이 독특한 철학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요? 허무적이라고나 할까. [[가타가나]]로 [[유머]]가 아니라 한자로 [[해학]]이라고 표현하는 게 가장 맞는 것 같아요. 뜻은 같을 수도 있지만 왠지 모르게. 만화의 스토리 자체는 간단합니다만, [[간사하쥐]]든, [[키타로]]든, 제대로 된 [[철학]]이 하나 있어서 거기에 따라 말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저는 요기전 같은 초기 작품이 특히 걸작이라고 생각해요 .여기에 나오는 대사들은 이후 계속 그려지는 미즈키 작품의 대사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말씀하셨어요, '그림은 수업하면 누구나 잘하지만 줄거리는 그렇지 않아.' 재능이 90%이고 나머지는 노력이라고요.(웃음) 아무리 노력해도 미즈키 선생님의 세계는 그려지지 않네요. 나는 소심하기 때문에, 선생님의 생활방식에 영향은 받지 않았습니다만, 훌륭하다, 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답변했다.[[https://crea.bunshun.jp/articles/-/25539?device=smartphone&page=2|#]]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g_5b99dfb599b935b6aac81314f1b6946b2006918.jpg|width=100%]]}}}|| >미즈키 시게루의 일본 현대사나 전원 옥쇄하라!를 그린 것은 전쟁을 겪은 만화가로서 남겨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 죽은 사람들의 원통함, 패전은 멸망이었다. 끼니를 거리지 않고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는 현대는 [[천국]]과 같다.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https://www.excite.co.jp/news/article/Litera_3155/https://www.excite.co.jp/news/article/Litera_3155/|#]] [[전원 옥쇄하라!]]와 같은 전쟁 만화들은 스토리 전개에서 [[맨발의 겐]]과 동일한 [[사실주의]] 경향의 전쟁 체험담을 그려낸다. [[동남아시아]]로 배치되었을 때 보았던 [[일본군]]의 전쟁 범죄를 묘사해내기 때문에 전후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자료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 만화에서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군 위안부]]를 목격한 것을 그렸는데[[http://waterlotus.egloos.com/3454770|#]] 위안부 여자들은 남자 수십 명을 상대하다 성기에 정액이 가득차서 화장실에 가서 이를 내뿜어야 할 정도였다고 하며 자신은 여성이 이런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 너무 끔찍해서 동참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위안부는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다가 격침되어서 모두 죽었다고 한다. 마지막에는 "이걸 두고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난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마무리하였다. 작가가 그린 위안부 관련 묘사는 한국 인터넷상 기준으로 8페이지 남짓인데 번역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본인이 사망할 때까지 그걸 공개하지 않았기에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중일전쟁]]에 대한 만화도 그렸다. 제목은 쿠냥.[* [[협화어]]로 아가씨를 의미한다.][[https://gall.dcinside.com/comic_new1/4676723|#]] 이 만화는 중국까지 쳐들어간 일본인이 중국인들을 학대하고 여자애들을 징발해가서 성노리개로 삼았다는 폭로를 담았다. 다만 이는 들은 얘기이며 미즈키 시게루는 중국까지 갔던 적은 없다고 한다. [[미즈키 시게루/생애]]에 언급된대로 미즈키 시게루는 남방전선의 라바울에 있었다. 이런 [[평화주의]], [[반전주의]] 성향은 그의 작품의 애니메이션 제작진도 이어받아서 [[게게게의 키타로]]는 매 시즌 사회문제와 일본 과거사를 폭로하는 내용이 들어갔으며 특히 미즈키 시게루 사후 제작된 [[게게게의 키타로(애니메이션 6기)|6기 애니판]]은 [[일본의 우경화|일본이 우경화]]된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가차 없이 묘사해서[* 그 중에서도 20화 [[요화(게게게의 키타로)|요화]] 에피소드는 그의 성향을 많이 담아냈다.[[https://bbs.ruliweb.com/family/211/board/300075/read/30604091|#]]] [[넷 우익]]들에게 방영될 때마다 까이는 작품이 되었다. 넷 우익들은 까기에 바빴지만 이 작품은 아침 방송인데도 시청률도 잘나오고 작품의 평가도 훌륭해 권위 있는 상인 갤럭시상을 수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